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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부정공>자곡공휘창준묘갈명(紫谷公諱昌駿墓碣銘)
紫谷公諱昌駿墓碣銘 近世有志自修之士遠覽高擧深藏不出於窮山絶海之中以之自靖者多矣若紫谷趙公諱昌駿即其一也公資性聰悟十三四巳能誦四書六經亦復手抄爲終身讀本孝友出入樵採爲養不廢於傷哉之地及其遭艱毀瘠盡禮鄕隣嗟歎事伯仲氏如父衣食每先於巳居宿必同其室疾則藥餌浣滌不委於人子姪請代亦不許曰吾兄百歲徽雖欲行此復可得乎親族有欲兄弟析居者引先祖相好亭長枕大被事諭之閭里有爭辨者必溫言和解曉之以義理多有感化者每日早起整攝衣中終日兀然靜對方冊講究經訓以及朱宋兩夫子大文字亦輪流成誦有所疑則必仰讀俯思以不得不措爲科程門卷庭除必掃濾書籍几案必整齊曰母使褻汚也治家尤謹於節文抄家禮要旨爲一冊曰人若不知四禮與禽獸何異雖婦女輩亦必敎以喪祭等節曰祭嚴喪遽女子尤當習此可以助人宗祀之重矣於先聖賢最尊朱子雖片言隻字信之如神明其自號以紫哭實取紫陽雲谷之義亦可見雅志之一端也晩好宋子書尊信服習亞於朱子曰宋子眞朱子後一人也爲之範選其書爲十冊名曰宋子書節要於同時最慕勉菴崔公每讀其疏章而讚歎曰宋子後能明春秋大義者此公也公於一切世味淡然無所好惟曙義尙節論到古今人樹立大凄輒慷慨泣下迨其疾革猶整而不亂誦太極圖說及抑詩不錯可驗其所養矣蓋公一生劬經服禮尊賢樂善闇然自修不求人知歛藏沒世不受垢埃於濁世之中其學問之實不可誣而亦豈非高人一等足以警夫俗儒之徇名自敗者矣可欽也巳公字景彦淳昌之趙以勝國忠獻公諱元吉褘顯祖有諱깳以孝 贈童蒙敎官諱宗熺壽階副護軍諱洹以學行被薦號遯菴即公之曾祖祖考也妣廣州李氏象參女右議政忠僖公仁孫后公生于 純祖甲午十一月二十日卒于庚戌三月七日享年七十七配瑞山柳氏寅煥女生以辛卯卒於癸卯配公無違德公之藏即求禮顯桂肆面論谷里先塋向坤之原孺人窆在谷城牛谷面山水洞坐甲之山生一男二女男泳愚而朴海斗李敎植婿也孫男女尙幼不錄公之從子泳善來謁刻幽之文而即受學於公者也掃其貌聽其言能洞然辨決於人獸華夷充逆之分亦可知公之所以敎也余不忍終辭力疾撰次繫之以銘曰惟學是篤所抱則長行修信孚于家于鄕遯世無求時適無陽孰識其美以褒以揚兄子求銘不忘義方我辭揭實鐫在幽堂 安東 金福漢 撰 志山文承旨 자곡공휘창준묘갈명(紫谷公諱昌駿墓碣銘) 근세(近世) 자수(自修)에 뜻을 둔 선비가 먼 안목과 높은 지표를 가지고, 궁산(窮山) 절해(絶海)에 들어가 밖에 나오지 않고 스스로 조용히 지낸 사람이 많은데, 자곡(紫谷) 조 창준(趙諱昌駿)이 바로 그중 한 사람이다. 공은 총명하여 十三∼十四세때 부터 四서六경(四書六經)을 거의 외고, 또 손수 초(抄)하여 평생 독본(讀本)을 삼기도 하였다. 효우(孝友)가 남달리 뛰어난 공은 몸소 나무하고, 나물 캐는 일을 하여 어버이를 봉양하며, 가난하여 감지로 봉양 못한 것을 한탄 하더니, 그 상사를 당하여 몸이 여위도록 예제(禮制)를 따르니 주위에서 모두 애처롭게 여겼다. 공은 또 백씨 중씨 형을 부모처럼 섬겨 의식을 언제나 자기보다 먼저 드리고 같은 방에서 함께 지냈다. 그러다가 병이 나면 몸소 약시중을 하고, 남에게 맞기지 않았다. 자질(子姪)이 와서 대신하겠노라 해도 허락하지 않고 하는 말이, 『우리 형님 가신 뒤엔 내가 이런이을 하고 싶어해도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친족(親族)이 형제 분산코저 한 자가 있으면 공은 선조(先祖)가 상호정(相好亭)에서 긴 베개 큰 이불로 함께 지낸 사실을 들어 개유시켰고, 마을에 혹 다투는 자가 있으면 온화한 말과 이치있는 말로 화해를 시키면 감화를 받은 자가 많았다. 아침이면 언제나 일찍 일어나 옷차림을 단정히 하고, 똑바로 책을 대하고 앉아 경훈(經訓)을 강구(講究)하다가 주자(朱子)나 송 우암(宋尤菴)의 대문자(大文字)가 나오면 또한 완전히 외워두고, 의심 나는게 있으면 읽어보고 생각해보고 하여 기여이 알아내고야 마는 것으로 과정(科程)을 삼았으며, 문밖 뜰을 깨끗이 청소하고 서적(書籍)과 책상을 언제나 정리해두며, 『누구도 함부로 더럽히지 말라!』 하였다. 집안 살림을 더욱 철저하게 하였으며, 가례요지(家禮要旨)를 초(抄)해놓고 말하기를, 『사람이 만일 사례(四禮)를 모른다면 금수(禽獸)와 그 무엇이 다르겠는가?』라고 하고, 비록 아녀자라 할 지라도 상제(喪祭)등에 대한 절차를 가르쳐 주면서 말하기를, 『제사란, 엄숙해야 되고 상(喪)이란 갑자기 당하는 것이니, 여자가 더욱 익혀 두어야 할 일이다. 이것이야 말로 사람의 종사(宗祀)를 돕는 중대한 일이다.』 라고 하였다. 옛 성현 가운데 주자(朱子)를 제일 높이 여겨 비록 편언척자(片言隻字)라 할 지라도 신명(神明)같이 믿었으며 자곡(紫哭)이라고 호(號)를 한 것도 실상 「자양운곡(紫陽雲谷)」의 뜻을 취한 것이니, 그의 아지(志之)의 일단(一端)을 보여준 셈이다. 늘그막엔 「송자서(宋子書)」를 좋아하여 존신복습(尊信服習)하기를 주자(朱子) 다음으로 하고 말하기를 『송자(宋子)는 진정 주자(朱子)다음의 한 사람이다.』라고 말하고 그의 글을 뽑아 十책으로 만들고 「송자서절요(宋子書節要)」라고 이름을 붙혔다. 그와 때를 같이하여 최 면암(崔勉菴)선생을 역시 사모(思慕)한 나머지 그의 소장(疏章)을 읽고 찬탄하기를, 『송 우암(宋牛菴)이 떠난 후 능히 춘추(春秋)의 대의(大義)를 밝힌 사람은 이분이다.』 하고 하였다. 공은 세상 일에 대하여 담담할 뿐 좋아하는 바가 없었고, 단 의리에 관한 일이나 지절(志節)에 관한 일이면 즐겨하였으며, 의논(議論)하다가도 고금(古今)인이 대체(大體)를 수립(樹立)한 부분에 이르러서는 강개한 나머지 눈물까지 흘렸으며, 병이 들어 위독한 때도 오히려 단정히 앉아 자세를 흩으리지 않고 「태극도설(太極圖説)」 억시(抑詩)를 외우는 등 그에 대해 어김이 없었으니 그의 수양해온 것을 증험 할 수 있겠다. 이렇듯 공은 평생을 통해 구경복례(劬經服禮)하고 존현락선(尊賢樂善)하여 조용히 자기 몸만 닦았을 뿐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았고, 역시 세상을 하직할 때까지 혼탁한 세상의 풍진을 받지 않았으니, 참된 그의 학문을 속일수가 없다. 그러니 어찌 고인(古人)같다고 하지 않겠는가! 이는 명예를 추구하다가 스스로 망쳐버린 세속의 선비들에게 경계가 되고도 남음이 있겠다. 그러므로 공경할 따름이다. 공의 자(字)는 경언(景彦)이다 순창조씨(淳昌趙氏)인데 충헌공(忠獻公) 원길(元吉) 이 현조(顯祖)이며 그뒤 집(깳)은 효(孝)로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증직받고 종희(宗熺)는 수직(壽職)으로 부호군(副護軍)이 되었고, 원(洹)은 호(號)가 둔암(遯菴)인데 학행(學行)으로 추천 되었으니 곧 공의 증조(曾祖)·조(祖)·고(考)이며 비(妣)는 광주 이씨(廣州李氏) 상삼(象參)의 딸로 우의정(右議政) 충희공(忠僖公) 인손(仁孫)의 후예(後裔)이다. 공은 순조(純祖) 갑오(一八三四)년 十一월 二十일에 태어나 경술년 三월 七일 세상을 뜨니 향년 七十七세였다. 배(配)는 서산 유씨(瑞山柳氏) 인환(寅煥)의 딸로 신묘(辛卯)년에 태어나 계묘(癸卯)년에 세상을 떳다. 공의 무덤은 규례현(求禮縣) 계사면(桂肆面) 논곡리(論谷里) 선영(先塋)이 있는 곳 곤원(坤原)에 있으며 유인(孺人)의 무덤은 곡성(谷城) 우곡면(牛谷面) 산수동(山水洞) 갑원(甲原)에 있다. 一남 二녀를 두었는데, 남(男)은 영우(泳愚)이고, 박 해두(朴海斗)·이 교식(李敎植)은 사위다. 그리고 손남(孫男)과 손녀(孫女)는 어리므로 쓰지 않았다. 공의 종자(從子) 영선(泳善)이 나를 찾자와 묘문을 청하는데 그는 바로 공에게 배우던 사람이다. 그 얼굴을 대해보고 그의 말을 들어볼 때 사람과 짐승, 중국과 오랑캐, 충신과 역적이 되는 한계를 확실히 알고 있다. 이를 볼때 공이 어떻게 가르쳤는가를 알 수 있겠다. 그래서 나는 차마 사양하지 못하고 병을 무릅쓴채 다음과 같이 쓰고 오직 다음과 같이 銘한다. 학문이 돈독하여 내포한 것 오래더니 惟學是篤所抱則長 행수(行修)에 대한 믿음 집이며 마을 이었어라 行修信孚于家于鄕 세상을 등진 뒤 구하지도 않았지만、 때마침 양명(陽明)마져 없었더라! 遯世無求時適無陽 공이 가진 그 아름다움、 그 누구가 아랴、 포(褒)도 하고 양(揚)도 해야지 孰識其美以褒以揚 형의 아들 명(銘)을 청하니 의방(義方)은 잊지 않았구려! 兄子求銘不忘義方 내가 한말 이 사실을 공의 유당(幽堂)에 새기노라! 我辭揭實鐫在幽堂 안동(安東) 김복한(金福漢)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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